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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았다, 2017.
*사진의 저작권은 김재원 작가님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엔 공사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죽은 듯이 보이는' 동네를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살아있는 동네를 죽이며 자신들이 이들을 구원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구원의 대가로 그들은 자본을 받아간다. 몇 년 전에는 상수동이 그랬고, 망원동이 그랬으며, 연남동이 그랬다. 이제 종로3가, 익선동에 공사장 소리가 난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더러워 보이는 것들을, 낡아보이는 것들을 계속해서 부수고 다시 짓는다. 부수어지고 다시 태어난 집들은 또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다시 부수어지고 다시 지어진다. 우리는 점점 낡은 것을 잃어가고, 새롭고 자극적인 것만을 찾고 있다. 그리고 여기엔 '죽은 듯이 보였던'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 그 '죽은 듯한' 동네의 생명력이 배제되어있다. 작가 김재원은 그런 동네에 모였던 이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런 동네에 모였던 이들, 그리고 어쩌면 그 동네에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한다. 세련된 복고풍 서체로 쓰여진 '낙원장' 간판으로 시작하는 전시는 남성의 육체를 재구성하는 이미지와 더불어 서울의 게이플레이스인 종로3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일반적이지 않기에 추방된 자아가 모이는 곳, 낙원상가 너머의 이야기를 작가는 소개한다.

작가는 한 모텔방에 들어가 청소를 한다. 속옷이나 다 쓴 콘돔, 젤 포장지 따위를 쓰레기 봉투에 담아 가지고 나온 작가는 다시 이를 쓰레기 봉투에서 꺼낸다. 게이들이 애널섹스 시 흔히 사용하는 아이샵 젤 포장지는 누군가 그 방에서 보냈을 지난 밤을 상상하게 한다. 작가는 누군가의 지난 밤을 쓰레기 봉투에 담고 그 방을 치운다. 그것은 흔히 숙박업소에서 방을 청소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지만, 이를 가볍게 청소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작가는 방진복을 입고 조심스럽게 쓰레기를 담고, 청소를 한다. 그리고 그의 옷은 자기가 이 방의 외부인이라는 사실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작가는 자신이 이 방의 타자임을, 이 밤의 타자임을 드러내며 누군지 모를 밤의 주인공들을 타자로 설정한다. 이 타자는 전시장에서 영상을 보는 관객과는 다른 욕망의 주체이며, 일상에서 배제되는 성소수자이고, 가장 사적인 행위인 성관계의 공간마저 자신의 공간에서 배제된 타자이다. 작가는 이 타자가 '오염되지 않도록' 방진복을 입고, 그들을 쓰레기 봉투에 담는다.


쓰레기는 왜 버려져야 하는가?

익선동에서 부수어지고 '다시 태어난' 카페나 식당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흔히들 더럽다고 생각하는,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버려진다. 하지만 그것들은 왜 버려져야 할까? 쓸모없다고 이야기할 때 그 쓸모는 누구의 기준에서 정해지는 것일까? 성소수자와 같이 배제된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이 누구이든, 어떤 사람이든 우리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음에도 그들의 존재는 더럽다고 생각되고 쓸모가 없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지워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정말 우리의 쓸모를 입증하고, 우리가 더럽지 않다는 것을 웅변해야만 하는 것일까?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이 드는 흔한 반대 사유 중 하나는 에이즈 치료에 막대한 세금이 든다는 것이다. 나는 세금이 어떻게 집행되는지, 정말로 그 치료에 막대한 금액을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지 등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허나 그것이 정말로 세금 낭비인가? 그 병이 에이즈라는 이유로, 환자인 국민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는 안되는가? 그리고 이에 항변하기 위해 게이들은 에이즈가 게이의 전유물이 아님을 웅변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이 더럽지 않다고 외치는 것이 정말로 '질서'에 편입되는 방법일까?

작가는 이러한 질문들에 화답하는 듯이 쓰레기봉투에 담아 나온 물건들을 모두 꺼내어 드럼세탁기에 세탁하듯 돌려버린다. 돌아가는 낙원장의 간판 이미지처럼 쓰레기들은 드럼 세탁기 안을 돌고 돌며 사회가 원하는 것처럼 깨끗해지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깨끗해진(이라고 가정된) 이들은 다시 사회로 편입될 수 있을까? 그들이 더럽다고 말하는 그 핑계가 거짓임을, 작가는 직접 그들이 사용하는 '깨끗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 고발한다. 또한 작가가 벗겨내는 위선의 가면은 사회나 종교와 같은 거대한 집단보다도 개인을 향한다. 작가가 주워담은 누군가의 밤이, 누군가의 성욕이, 누군가의 존재가 남들과 다르지 않음을, 그 타인들이 고상하게 전시장에서 영상을 보는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세탁기에 돌림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실 세탁되지 않았다. '일반적'인 질서에서 쓰레기봉투에 담겨지는 것들은, 다시 씻겨지지 않고 돌아가는 이미지만을 획득한다. 이는 마치 게이가 게이플레이스에서의 자아를 세탁하고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과도 닮아있다. 작가가 쓰레기봉투에 주워담은 모든 것들은 타인에 의해 버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밤의 주인, 성욕의 주인, 존재의 주인이 버린 것이다. 종로3가에서만 자신을 표출할 수 있고, 서로를 끌어 안을 수 있는 게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한다. 옥상의 빨랫대에 널려진 빨래들은 그 존재들이 왜 버려져야 하는지, 왜 씻겨져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그리고 사실은 깨끗해지지 못한 이미지들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어 간다. 게이는 왜 낙원장에서만, 종로3가에서만 게이일 수 있는가? 그렇다고 종로3가를 벗어난 게이들이 게이가 아닐 수 있을까?


낙원장

대대적인 익선동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이제 게이플레이스인 종로3가를 향해 있다. 이제 평범해진 연남동, 망원동에 질린 사람들은 옛스러운, 서울스러운 낙원동과 종로3가를 향한다. 그리고 그들은 죽은 것 같았던 동네에 있는 자신을 남들보다 좋은 취향과 안목을 가진 자신으로 포장한다. 그렇게 허름한 여관이었던 낙원장도 부수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게이들의 공간적 입지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는 종로나 이태원이만 몰려있던 그들의 정체성을 해방시킨다고 말할 수 있으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종로와 이태원에서 쫓겨난 그들은 자신을 다시 입을 곳이 없다.

게이들이 종로3가 뒷골목에 모이는 이유는, '일반적인 질서의 사람들'이 그곳을 찾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숨겨왔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면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이 필요하다. 아무도 찾지 않았던 종로3가와 이태원 골목은 적은 자본으로 높은 효과를 창출하고자 하는 '청년'사업가들에 의해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일반적인 질서의 사람들'이 찾지 않았기에 변화하지 않은 공간, 과거의 시간을 그대로 품고 있는 공간은 오랫동안 먹지 않은 어떤 것을 먹은 사람처럼 품고 있던 것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자본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는 더욱 더 늘어가는 것만 같다. 새로운 낙원장 간판을 드럼세탁기처럼 돌려버리는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우리가 원하는 현재인지, 그리고 미래인지를 되묻는다. 소비할 곳을 한 군데 늘려가는 것이 정말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주었나? 허름했던 공간을 멀끔하고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 정말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주었나? 전시는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 자본과 비자본의 경계를 가르며 개인이 아닌 우리라는 집단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결국 '우리'라는 집단을 경계 짓기로 되돌아간다. 우리라는 집단에 종로 뒷골목에 모이는 게이가 있었나? 우리라는 집단에 자신의 집을 빼앗기는 익선동 주민이 있었나?


그 우리라는 경계가 과거보다 더 작아지고 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자신 외부의 모든 것을 배척해가는 것만 같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러한 배척된 타자를 보며 안도한다. 배척된 타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 말이다. 허나 이는 단지 그들의 순서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젠트리피케이션, 성소수자, 에이즈, ..., 모두 타인의 이야기 같지 않은가? 작가가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나태한 안도일 것이다. 그 순서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리고 자본이 정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누군가와 자본이 아니라면, 그 다음은 나와 당신들일 것이다. 결코, 안도하지 말라. 이는 절대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