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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규식 큐레이터가 기획하고 서울의 6699프레스에서 펴낸 뉴노멀, 2020 [979-11-89608-04-0 (92650)]을 위해 쓴 글입니다.

지금도 종종 당신들을 생각합니다.


아, 저는 친구 안 찾아요


조금 더 어릴 때에,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과 별 걸 다 공유하고 보여주던 어린 날에, 가끔씩 사람들이 카카오톡 친구목록이나, 페이스북 친구 수를 보면서 놀란 내색을 보일 때가 있었다. 이렇게 친구가 많아요? 물으면 나는 그냥 그러게요, 하고 넘겼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친구들이 대부분 사진 있어요? 물어보면 친구는요? 대답하는 그 친구라서 그렇지. 현저하게 낮은 사회성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친구가 많은 이유는 내가 어플로만 그런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였다. 친구는요? 물어보던 친구들은 친구로 지내요의 친구가 되고, 그렇게 카카오톡 친구 목록은 다시 볼 일 없는 친구들의 이름으로 채워진다. 그러면 나는 그 이름들을 살짝 밀어서 숨김 버튼을 누른다.

사진앨범에서 그 때의 촌스러운 옷차림 같은 것들을 보며 아련해지는 것처럼, 친구로 지내기로 한 친구들의 프로필사진들을 보면서 괜히 아련해진다. 내가 더 이상 그 때의 속도로 친구 수를 불려가지 않게 된 후로, 나에게는 친구 목록이 언제나 줄어들기만 한다. 친구 관계가 어려워진 친구들은 카카오톡 계정을 지웠다가 다시 깔고, 페이스북 계정을 비활성화한다. 그렇게 그런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짐을 마주하면, 그럴 리 없겠지만 나는 그 때의 시간을 모두 잊고 잃어버리는 것만 같다. 우리는 더 이상 친구로 지내기로 한 친구도 되지 못하며, 길에서 만나도 서로의 이름을, 그리고 서로를 그렇게 불렀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그 친구들이 섞이며 타인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간극이 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말도 섞지 않는 친구가 됨으로 각자의 안전한 사회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안전한 사회와 친구들의 사회를 공유하는 우리의 암묵적인 룰이다. 그래서 숨긴 친구 목록에서 그를 소리없이 관음하는 일은 우리 서로를 모두 해치지 않으면서 그 때를 기억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그렇게 많았던 친구들의 대부분은 사회에서 게이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지난 나의 취향이었던 것도 맞다. 그 대부분의 친구들은 안전하게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으로 이성애자 남성을 연기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들은 해가 떠 있을 때에는 이성애자로 살다가, 해가 지면 종로에서 남자들을 만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슨 전설이나 신화의 이야기가 아니고, 천사소녀 네티의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그런 것들이 밝혀지면 집이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다. 우리 대부분은 그렇지 않나? 나는 그들과 함께일 때에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춰서 가장 친밀한 사람이다가, 모르는 사람이다가를 반복한다. 다시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냥 친구에요, 대답하는 그런 친구가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연기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스로를 둘로 쪼개어낸다. 그가 해가 졌을 때의 표정을 나에게만 보여주는 것처럼, 해가 뜬 시간 속 그의 표정을 나는 영원히 목격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에 묘한 질투를 느끼면서, 동시에 측은함을 느끼기도 했다가, 내가 뭔데?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끼기를 그만둔다.

꽤 오랫동안 나의 친구목록은 카카오톡이 업데이트되는 빈도보다 빠르게 변해왔고, 스마트폰을 갈아치운 횟수보다는 많게, 나도 카카오톡 계정을 지웠다가 다시 만들었다. 그래서 외로웠나? 생각하면 외롭지 않았던 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더 외로웠던 것은 또 아니었다. 어플에 들어가면 아직도 수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고, 그것이 주는 조급함이나 수치심과 동시에 어플에서 그들을 목격하는 일은 꽤나 안전한 느낌을 준다. 적어도 내가 이 세상에서 혼자는 아니라는 느낌 말이다. 그러니까 이는 내가 그들과 함께라는 뜻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영영 외롭게 혼자 남아도 그것이 나의 일만은 아니라는 위안 같은 것이다. 내 마음이 너무 미운가? 하지만 계속될 외로운 시간에 우리가 또 언젠가 친구일 것도 맞으니 내가 방금 아니라고 했던 그 의미가 영원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다. 그래서 나는 혼자가 아닌가? 아니다, 나는 영원히 혼자로 남을 것이다. 내 마음이 미운 탓이다.

수많은 친구들이 초록색 동그라미를 띄우고 친구를 찾는다. 나는 초록불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속도로, 누군가와 함께했다가 그 기억을 모두 지우기를 반복한다.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누군가와의 사진을 지우면서 나는 그 시간들을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다. 드라마에서나 목격하는 이 상투적인 방식에 의구심이 들겠지만, 이건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순간들에 종종 당황하게 된다. 내가 삭제한 사진의 주인공이 다시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 그러니까 나는 그를 차단했는데, 그가 스마트폰 화면 밖에서 등장했을 때에 말이다. 그가 이미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그를 사라지게 할 수가 없어서, 어떡하지?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입을 닫고, 도망친다. 우리의 암묵적인 룰에 근거한 나의 최선의 방어책이다. 이게 방어책이란 말은, 그가 우리의 룰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누구도 그를 벌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럼 나의 안전한 사회는 어떡하지? 일단 입을 닫고 도망친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스스로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계속해서 타인을 봐야한다.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상상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추측한다. 친구들이 자주 바뀌고 아침과 저녁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늘 헷갈린다. 나는 하루하루의 연속성을 잃어가고, 매일이 일탈이 된다.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를 때에 나는 숨긴 친구 목록을 연다. 나는 그 안에서 그들이 내게 남겼던 말들을 주워서 나를 찾아낸다. 그들과 이별할 때 함께 이별한 '그들이 보는 나'를 주워서 '그들이 없는 나'를 만들어본다.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또 친구들을 찾고, 또 다시 외로워졌다가 그렇지 않았다가 한다. 영원히 혼자로 남을 나는 영원할 나의 혼자조차 알지 못한다.

남들이 먼 훗날 꾸릴 자신의 가족을 상상할 때부터, 나는 혼자인 나를 떠올렸다. 그것은 제도가 지켜주지 않고 사회가 목격하지 않는 우리의 평범하지 못함이고, 관계의 지속이라는 감각을 잊은 나의 행동패턴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어플에서 나이를 야금야금 속이던 누군가의 그 나이 즈음이 된다면? 용돈을 준다고 어린 친구들에게 쪽지를 보내던 누군가의 그 나이 즈음이 된다면? 이쯤 되면 이것은 그런 이유들보다 내 마음이 미운 탓임이 명확해진다. 우리는 연속되지 않는 우리의 존재를 그 나이 즈음 너머로 반복할 수 있을까? 젊음이 끝나갈수록 더욱 가까이 마주하는 그 미래에는 어떻게 대항해야 할까? 그것이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과 다름에도 그 미래가 떨쳐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나는 이 미운 마음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들 세상을 간단히 인식할 때에 범하는 일반화의 오류는 정말로 오류라서, 아마도 내가 간단히 쓴 이 글자들 대부분도 오류일 것이다. 나는 게이이면서 동시에 여러 친구들이나 당신과 사회를 공유하는 개인이라, 우리가 공유하는 낮과 밤이 생각보다 비슷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이성애자는 여기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낼 수도 있겠다. 내 숨긴 친구 목록에도 친구로 남기로 한 친구들만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그럼에도 우리가 결코 그렇게 혼자 남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시간이 좀 흐른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납작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혼자인 상상이 떨쳐지지 않는 것은 내 마음이 미운 탓이다. 아마도 나는 계속 마음이 미울 것이고, 우리는 각자 혼자지만 또 어플에서 친구들을 찾아낼 것이다.

숨긴 친구 목록을 열면 또 늘처럼 친구들의 프로필이 있다. 누구는 얼굴이 조금 변했고, 누구는 프로필 사진을 지웠고, 누구는 대신 전혀 모르는 얼굴이 뜨는 걸 보니 번호를 바꿨나 보다. 조금 멀리서 보면 다들 똑같은 한 줄 같은데, 누군가의 이름은 언젠가를 또렷하게 기억나게 하고, 누군가는 또 . 같은 것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영원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게 수많은 . 들을 지나서 드디어 사람 이름 같은 이름들이 나오면 나는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누군가의 이름들을 관람한다. 나는 본 적 없는 그들의 낮시간의 이름, 내가 언제나 형 아니면 친구라고 불렀던 누군가의 다른 표정을 상상한다. 우리의 끝이 어땠는지를 떠올려서 그와 인사를 나눌 법한 지 생각해본다. 나는 인사를 건네지 않고 안도한다. 우리의 룰이 아직 작동하는 납작한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