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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차현지 작가님에게 소설을 배우며 쓴 글입니다.


어떤 나라의 말은 A로 시작한다


서울에 내 집이 없던 때였다. 아마도 A가 오랜만에 서울로 휴가를 나온 날이었을 거다. 우리는 울기 위해서 남의 집 방 한 칸을 빌렸다. 만난지 이미 일년정도 지난 후였는데도 우리의 시작을 생각하면 그 집이 떠오른다. 에어비앤비로 서울 한 가운데를 찍어 찾아낸 그 곳은 복고풍으로 잘 꾸며진 집이었다. 아주 어릴 적의 기억 속 주말 가족 드라마에 나오는 서울집 같았다. 거실을 두고 여러 방이 사방으로 연결된 집. 어두운 나무로 마감된 벽 때문에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가 선명하게 보이는 집.

아랫층에 무슨 방송 촬영을 하는지 카메라와 조명들이 분주해서 입구를 찾기 힘들었다. 길을 못 찾으니까 호스트가 윗층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대문은 힘을 줘야 열린다고 했다. 열리면서 힘을 준 만큼 요란한 소리가 났다. 호스트는 내가 길을 잃어 늦은 동안 일에 늦었다고 은근하게 짜증을 냈다. 그는 귀찮음과 짜증이 섞인 얼굴로 이 집에서 그를 찾지 않고 하루를 온전히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빠르게 설명했다. 대문은 열쇠가 아니라 힘으로 연다는 것, 대문을 지나 현관 앞에 열쇠를 보관하는 바구니가 있다는 것, 고양이들이 나가지 않도록 문을 열 때 조심해 달라는 것이나, 욕실의 대부분의 물건은 주인이 있다는 것. 부엌은 가정집보다는 카페나 식당의 주방 같았는데, 테이블이나 바닥을 가리지 않고 무언가를 올릴 수 있는 모든 곳에 와인잔이 놓여져 있었다. 전날 파티가 있었다고 했다. 호스트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며 일찍 자는 손님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해가 지면 조용히 지내 달라고 했다. 그가 기르는 고양이 중 덩치 큰 게 자꾸 내 다리에 몸을 비볐다. 쓰다듬어 달라는 뜻인가 싶어 쪼그려 앉았을 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그건 나를 온몸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환영 받지 못한다는 기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A와 함께라도 모텔방에서 울고 싶진 않았다.

어두워진 후에야 그 집으로 돌아왔는데, 밖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부엌은 더럽고 방에서는 뭘 먹지 말라고 해서 과자와 빵 같은 걸 거실에 앉아 조심히 뜯었다. 집 안에는 우리가 작게 비닐을 부스럭대는 소리만 났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 바닥에 붙은 맨발이 짝짝 떨어지는 소리라든가 두 발이 번갈아 바닥에 무게를 주는 소리 같은 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우리 말고 손님은 없는 것 같았다.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일찍 잠드는 손님은 어제 파티를 한 호스트인 것 같았다.

방은 사진과 비슷했지만 꾸몄다기보다는 꾸미지 못한 부분들을 잘 가린 느낌이었다. 침대 위에 누워서 넷플릭스에 볼 만한 게 있는지 살폈다. 싱글베드 두 개를 붙인 침대는 우리 사이에 골을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가 헤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헤어지는 사람들 같았다. 누가 뭘 보고 재밌다고 했는지, 혼자 뭘 봤는데 볼만했는지, 그런 지난 날 서로 늘상 하던 말들을 나눴다. 특별할 것 없는 그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귤을 쥔 손에 힘을 주면 한 방울이 되지 못한 끈적한 단 물이 손바닥을 감는 것처럼, 평범한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눈을 짓이겨서 눈물이 났다. 내일부터 함께 침대에 누워 이런 말들을 나눌 수 없을 것을 알았다. 울음을 참아보려고 눈과 코와 귀와 입에 힘을 줬다. 소리와 숨을 참아가며 얼굴에 가득 찬 울음을 눌러봤지만 얼굴에 난 틈 사이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걸 보고 A가 울었다. 우는 A를 보고 나서야 나도 울음을 뱉었다. 우리가 울어서 그런 평범한 순간이 당분간 우리에게 없을 걸 알았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아니었다. 서로가 무수히 말해온 헤어짐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시작을 생각하면 그런 것들을 떠올린다. 단 한 번만 들어가 본 남의 집, 너무 어두워서 오히려 썩은 듯한 색의 나무로 장식된 그 집에서 너와 내가 울었다. 다음 날 아침 현관 바구니에 열쇠를 넣고 요란한 그 대문을 닫으면서 다시 우리가 여기 함께 오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 문장에서 여기가 남의 집인지, 서울인지, 헤어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서 '깔끔하고 주택가라 조용하다'는 후기를 남겼다. 일찍 잠들지 모르는 손님은 그마저 귀찮았는지 엄지손가락 이모지 하나로 답변을 달았다. 모텔방을 빌리지 않은 건 다시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영화 컨택트를 봤다. 한국 영화관에서 컨택트를 볼 수 있던 그 계절은 초봄이었다. 이건 우리의 처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이다. 영화는 A가 보자고 했다. 영화관처럼 어둡고 갇힌 공간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영화관을 빼면 마땅히 생각나는 데이트 장소도 없었다. 성인 남자 둘이서 남들 몰래 손을 꼼지락 대기에 어둡고 갇힌 공간만한 곳이 또 없기도 하다. 내가 남을 볼 수 없는 까만 공간 안에서 누군가 나를 공격한다거나, 내가 세상과 단절된 동안 전쟁이 터진다든가 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이겨낼 수 있을 때에만 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 새로운 봄의 새로운 연애는 그런 상상쯤은 우습게 이겨낼 수 있다. 나는 그 영화가 뭔지도, 사람들이 그걸 많이 보는지도 몰랐는데 그냥 밖에서 A의 손이 잡고 싶어서 보겠다고 했다.

영화나 게임과 같이 남들이 다 보고 한다는 것들은 언제나 느리게 따르거나 관심이 없는 척하며 살았다.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등록금을 아껴보겠다고 바빴고, A와 만나던 그 때의 나는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잃은 나를 돌보느라 또 바빴다. 그 때의 나는 왜 산다는 것은 이렇게 가성비가 좋지 않은지에 몰두하고 있었다. 왜 하루 세 끼 식사의 값어치를 할 수 없는지, 왜 서울에서 내는 월세만큼의 가치도 만들어낼 수 없는지 같은. 그런 생각은 가치 없는 나를 굶게 하고, 내게 조금의 여가도 허락하지 않았다. A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A를 먹인다는 핑계로 함께 먹었다. 네이버에서 혼자서는 절대 가지 않을 맛집을 찾았다. 하루 세 끼 밥은 먹어야 하니까 밥 먹자고 불러 내고, 같이 아침을 먹자며 자고 가라고 할 수 있었다. A가 원한다는 핑계로 함께 놀았다. 수강신청만 하고 나왔던 피시방을 저녁마다 함께 다녔다. 둘 다 못하면서 FPS 게임을 두 세 시간씩 했다. 안 한다고 하면 집에 갈까봐 따라다니다가 나도 게임에 재미가 들었다. 컨택트도 그랬다. 내 주변 모두가 진작에 다 봤다는 그 영화를 A도 아직 못 봤다고 했다. 나는 A의 손이 잡고 싶었고, 핑계는 A가 컨택트를 보고 싶어서였다. 컨택트는 너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돼, 라는 말로 시작한다. 부리가 있는 둥근 글자체로 쓰인 그 자막 때문에 우리도 여기서부터 시작된 기분이 들었다. 어두워서 너의 얼굴만 겨우 보이는 여기, 해가 지고 나면 아직 조금은 쌀쌀한 여기, 아직 서로 마주 보는 것도 어색한 우리가 손을 잡고 남들이 다 봤다는 영화를 보는 여기.

그 무렵의 A는 미지의 사람이었다. 감정을 숨기려는 듯이 늘 미적지근한 얼굴이었고, 그가 지금의 상황을 좋아하고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함께일 때에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보기 바빴다. 그래서 내게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너는 굳이 너의 아이폰이나 만지러 삼십분 넘게 지하철을 타고 내 옆으로 왔다. 내가 좋아하는 표정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 관심 없는 이성애자 남성들을 좋아하며 자라서 그런가, 나는 그런 표정 없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 익숙하다. 얼굴에 힘을 전혀 주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표정, 그러니까 세상 모두에게 보여주는 그 표정의 누군가를 말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연애는 그렇지 않은 다른 표정들을 소유하는 것이다. 얼굴 근육의 긴장 사이로 스며 나오는 감정을 다른 얼굴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여러 상황 속 그의 얼굴을 배워야 한다. 그 때 A와 나는 만난지 고작해야 일이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서,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다양한 종류의 희미한 표정을 가졌다는 사실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 희미한 표정 때문에 그가 금방 사라질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말한 것처럼 나는 그런 것에 익숙했다. 그러다 내게만 보여주는 어떤 환한 표정이 아주 잠깐 떠오를 때, 연애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A의 얼굴이 미세하게 움직여서 그런 환한 표정을 아주 잠깐씩 보여주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 무렵에 우리는 내 방 열쇠를 나눠 가졌다. 반 년 가까이를 거의 같이 살았다. 반년 중 반은 와우산 언덕의 원룸에서 살았다. 고향인 B시에서 20년을 산 집이 주택이라 그런지 나는 원룸에 정을 들이는게 쉽지 않았는데, 1층이라고 하지만 반지하에 가까웠던 그 집은 특히 그랬다. 나머지 반은 C동의 주택에 세 들어 살았다. 방과 부엌이 분리된 데다 어딘가 본가를 닮아 마음이 편했다. A도 그 집을 좋아했다. 기숙사나 자취를 해봤자 대학가에서 살았던 우리는 그곳이 사람 사는 동네 같다고 말했다. 그간 가져본 적 없는 진짜 서울에서의 삶을 갖게 된 기분이었다. 언덕을 올라야 했지만 문을 열면 남산이 보였고, 아침엔 어릴 적 거실에서나 듣던 사람들 소리가 창 밖에서 들렸다. 금요일엔 어릴 때에나 보던 순대를 파는 트럭에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섰고, 골목 몇 개를 지나면 같이 학교를 다닌 누나가 살았다. 서로의 과거와 지금을 모아서 우리의 집을 채웠다. 그래서 그곳은 우리의 새 집인데도 익숙했고, 낯선 곳이었지만 편안했다.

우리가 C동에 살기 시작할 즈음엔 A는 이미 휴학 준비를 마치고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졸업 준비로 그만두었던 독일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 이틀에 하루꼴로 저녁마다 남산 위에 있는 독일문화원에 갔다. A는 군대에 처음 가봐서 군대 가기 전에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랐고, 나는 유학을 처음 준비해봐서 뭐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함께 했다. 함께 서로의 학교에 다녀왔고, 함께 게임을 했고, 함께 서로의 집에 다녀왔다. 특별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두달을 우리는 함께 허송세월을 보냈다. 두어 달이 지나서 그 집에서 훈련병 A가 볼펜으로 눌러 쓴 편지를 받았다. A는 내가 먼저 보낸 어떤 시간들을, 내가 먼저 다녀온 어떤 장소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머리 속 이미지에 A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A는 영영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렇게 몇 밤을 기다리면 휴가 나온 A가 문을 두드리며 늦잠을 자는 나를 깨웠다. 군복에 묻은 겨울 아침의 찬 공기가 살에 닿았다. 그런 기억들은 머리나 마음 속에서 정해진 모양이 없는 집 같은 것이 되었다. 그 무렵 나의 집은 언제나 A가 있는 곳, 언제나 내가 A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아직도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이제는 내가 모르는 타인이 살고 있을 C동의 집을 떠올린다. 그 이유를 늘 몰랐는데 그 때를 기억하는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지금 내 방에 누워서도 돌아가고 싶은 나의 집은 내가 너를 기다리는 곳, 몇 밤을 지나면 너가 문을 두드리는 곳.

A가 군대에 가고 나서도 다섯 달을 그 집에서 살았다. A의 휴가는 잦았지만 짧았다. 그 때의 나는 아직도 왜 이렇게 고되게 살아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서 힘들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는 기분이 들어서 더욱 그랬다. 몸에 맞춘 마냥 편안한 집을 찾았고, 혼자 야금야금 작업하며 계속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A도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질 것은 나였다. A가 없는 밤마다 내가 두고 가야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유학을 선택한 것은 나였지만, 그것은 과거의 나였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그간 완강하게 반대만 해오던 엄마가 갑자기 유학을 응원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오지 않을 기회임을 알았다. 삶의 커다란 선택을 늘 이런 식으로 해왔다. 내 선택에 대한 엄마와 누나의 반대를 오기로 버티다가, 진이 다 빠지면 갑자기 응원을 당한다. 전공을 고를 때에도, 새 집을 고를 때에도 그랬다. 진이 다 빠졌을 때엔 그런 것들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이번에도 버텨본 대로 일단 더 버텨보려고 했다. 아무런 기대가 없는 채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힘이 없는 채로 비행기 티켓을 샀다. 싼 티켓이라 환불 받을 수도 없었다. 마침내 찾은 편안한 삶을 모두 잃을 것이었다.

집을 정리하고 본가에 내려와 있는 동안에도 나의 집에 가고 싶었다. 밤마다 이불 속에서 숨을 참는 연습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숨을 멈추고 싶었다. 트위터 계정을 삭제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탈퇴하고 싶었다. 그러면 해피 엔딩으로 모든 이야기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이불 속에서 숨을 참는다고 모든 걸 멈출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했다. 당첨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복권을 사는 것과 같았다. 어느 때보다 폐활량이 좋은 상태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숨을 참았으면서 비행기를 타는 일이 긴장되는 것이 우습고 수치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서울에서 사라졌다.


그런 처음과 시작을 지나 이제 우리는 하루에 두 번 전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전화하고, 많아봐야 일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그런 연인.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데, 그럴 때면 연애란 대체 뭘까, 고민하게 된다. 울었던 우리 둘도 서로에게 그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안쓰럽다는 마음은 없었다. 죽으러 가는 건 아니니까. 그 날 내가 흘렸던 눈물은 그를 볼 수 없음이 아니라, 독일로 가기 싫음에 기인한 것이었다. 내게 그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제 내 곁에 아무도 없어서 울었다. 그런 울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그래서 그와 함께 울었다. 오히려 그가 입대할 때에는 울지 않았다. A에겐 입대가 그 시간을 정의하는 큰 사건이었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그를 영영 잃는 건 아니니까. 그 때부터 이미 A는 내게 반드시 오는 어떤 것이 되었다. 그가 아무리 바쁘고 다른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루에 한 두 번 전화, 그러니까 하루에 두 마디 목소리만 들으면 그런 반드시를 지어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반드시 그가 있을, 돌아갈 어딘가와 돌아갈 언젠가. 이 대신 누군가는 안정감이라는 현재적 단어를 쓰겠지만 내게 연애는 그보단 미래의 형태를 가진다. 반드시 올 언젠가.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돌아가게 될 집처럼.

연애를 정의하며 쓴 돌아갈 언젠가에 대한 기대는 사실 내가 연애에 기대하는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낳고 가르친 이성애자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나는 계속해서 그걸 갈망해왔다. 어쩌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자신의 30대, 40대를 그려보라는 숙제에 아직 머물러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당연히 그려가는 배우자와 아이, 행복한 가정 같은 것들을 부러워하면서. 하지만 그들을 부러워했던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니었다. 부모는 늦게 낳은 아들이 혼자 남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그래서 당신들은 아들이 말을 알아듣게 된 후의 모든 기억 속에 색시라는 단어를 남겨두었다. 색시라는 게 없으면 불행하게 혼자 늙어 죽는다고 했다. 어떤 것이 더 불행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아들에게는 색시라는 단어보다 불행하게 혼자 늙어 죽는다는 말이 더 기억에 남았다. 아들이 색시를 가지는 미래를 단 한 순간도 꿈꿔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서 색시를 가지지 않을 아들은 홀로 불행할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자랐다. 어떤 삶을 살더라도 색시가 없어서 불행할 미래를.

지난 연애에서도 늘 함께일 언젠가를 찾으려 했다. 기껏해야 만난지 사흘정도 된 상대가 이런 말을 건네면 지금의 나라도 달아날 것이다. 우리가 사귀는 것인지를 집착적으로 되물었던 순간과 기계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은 순간을 떠올리면 나와 마찬가지로 어렸던 그때의 남자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런 것들로 얻어내고자 했던 건 고작 어떤 이야기였다. 그것은 약속일 필요도 없었다. 그냥 몇 년 뒤에, 아니 몇 달 뒤에, 아니 하다못해 당장 내일도 우리가 함께일 것임을 암시하는 어떤 이야기. 몇 년 뒤에 어디 섬에서 같이 살자, 그런 부담스러운 말이 아니라 어디에 뭐가 생겼는데 조만간 같이 가자, 뭘 보고 싶은데 조만간 같이 보러 가자, 고작 그런 말들. 그런 말들이 빚어내는 미래를 얻고 싶었다. 혼자인 미래는 불행하다니까, 그런 식으로 불행하지 않은 내일을, 몇 달 뒤를, 몇 년 뒤를 만들고 싶었나 보다. 남들 중 누군가도 그런 이유로 연애를 하겠거니 싶다. 빈 혼자인 내일을 함께 채우려고, 몇 달 뒤 어떤 날의 달력에 함께일 어떤 사건을 써넣으려고.

모든 연애는 어릴 때부터 봐온 영화나 드라마를 흉내내는 일이다. 대부분의 교육이 그런 것처럼 어른들을 따라하면서. 나는 나를 낳고 가르친 이성애자들의 그것과 다른 나의 그것에 그들이 붙인 것과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혼자 불행하게 늙어 죽지 않아도 될까. 그래서 배운 대로 그들을 흉내 내어 본다. 그들이 하는 것처럼 A에게 전화를 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A를 부르고, 사랑하는 그들이 서로 하는 것처럼 A를 그리워해본다. 그러다 남들이 우리를 보듯 나도 우리를 안쓰럽게 보게 되면, 나는 집에 가고 싶다는 말로 그것에 저항해본다. 내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A가 그래서 언제 오냐고 묻는다. 안쓰러운 우리는 몇 달 뒤에 한 번 볼 것이고, 내일도 전화할 것이다. 몇 년 뒤에도 여전히 함께일 수도 있겠다. 나의 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시작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것이 우리를 기억하며 영원히 곱씹게 될 순간임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어비앤비로 찾았던 것은 사실 나의 집과 가장 닮은 집이었다. 그건 호텔이나 모텔일 수 없었다. 하루면 포맷한 컴퓨터처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그런 곳일 수는 없었다. 오래된 창문이 있어야 했고, 하얗지만은 않은 이불이 있어야 했다. 하루 묵는 우리가 대단한 흔적을 남기진 않겠지만 마치 우리가 남겨온 흔적처럼 느낄 수 있는 것들이 필요했다. 우리가 서울에서 이별하기 위해서, 그것이 서울에서의 내 집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돌아가고 싶은 나의 집엔 우리의 울음이 없다. A가 오지 않을 지금의 내 방에서 돌아가고 싶은 나의 집은 우리가 이별한 적 없는, A가 반드시 오는 집. 너가 남들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환하지만 여전히 희미한 그 표정으로 내 시선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