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 국문 DEU

2021년 작가 김현희, 유연주가 참여한 킵인터치 서울에서의 전시 연결된 기둥들 - Hyperlinked Columns을 여는 글로 쓰여졌습니다.

그래픽 디자인: 이석현.

현실에서 우리는 여러 이름을 횡단한다. 글을 쓰는 나는 개별자이면서,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도 있고, 남자로 존재하지만, 어떤 때에는 그보다 게이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어떤 순간에 나는 성소수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그런 이유로 소수자라는 층위에 서 있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순간엔 특권을 가지면서, 어떤 순간엔 차별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이름들을 우리는 순간순간 자신의 역사로서 전유한다. 나는 내 개인적인 시간의 흐름, 개인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도중에 그런 역사적 이름으로 순간순간 존재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남들과 다른 개별자이면서, 남들과 같은 인간일 수 있다.

개인인 ''가 역사적 존재라는 사실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전제한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타인과, 남자라는 이름의 타인과, 성소수자나 소수자라는 이름의 타인과, 또한 그렇지 않은 타인들과 함께. 이런 이름들이 영구적이지 않고 순간적이라는 것은 각자에게 여러 이름들이 걸쳐져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걸쳐진 여러 이름들을 통해, 나는 나와 다른 타인과도 함께할 수 있다. 이는 이미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앞선 전제와는 다른 가능성인데, 단순히 여러 타인과 지구에 함께 살고 있다는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같은 지평을 공유할 수 있다는, 서로 공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어떤 순간에 차별받는 나는, 겪어본 적 없는 또 다른 차별을 겪는 누군가와 같은 역사를 전유한다. 우리는 서로 너무나도 다르지만, 차별이나 억압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함께 서 있다. 그래서 우리는 광화문에서 함께 울 수 있다. 4·3의 희생자와 유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으며, 실향민과 함께할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들과 함께 울 수 있으며, 강남역의 포스트잇들과 김기홍, 변희수와 같은 이름을 기억할 수 있다. 내가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을 진 타인과 함께하는 것은, 보다 여유롭거나 보다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차별이나 억압을 경험한다. 각자의 아픔은 저마다 다르지만, 어떤 순간에 약자이고 소수자인 우리는 모두 하나의 역사 위에 있다.

가능성이라는 말은 그것이 아직 현실에 도래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 같은 역사를, 같은 이름을, 심지어 같은 땅을 점하면서도, 타인과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만을 보고 싶어 하곤 한다. 차별받거나 고통받는 타인들에 무심하며 종종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이 아님에 안도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의 타자화로 우리는 스스로가 안전하고, 자신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 땅의 지난 역사가 그렇게 가르치기도 했다. 여러 낙인들을 통해 작동했던 공포정치가 사람들을 갈라놓았음을 기억한다. 낙인찍힌 자를 돕는 자에게 또한 낙인이 찍혔다. 그런 역사를 배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그에게 그럴 만하다는 이유를 만들어 붙이기도 한다. 이제는 그런 말들이 자신을 지켜주는 시대를 살지 않으면서도. 불합리나 불행을 겪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 마땅히 안전해야하는 ''는 타인과 다르지 않다.

이 전시는 두 작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비추는 연대의 시다. 김현희 작가는 간명한 직선의 형태를 경유하여 고향의 상흔을 담아낸다. 유연주 작가는 고향을 잃은 할아버지의 역사를 씨실 삼아 자신의 시간 속으로 직조해낸다.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역사를 자신의 시간에 재구성하는 것은,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역사로 전유하고자 하는 시도다. 이를 통해 그들과 함께인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은 동시에, 그들 너머 우리가 차별과 억압 아래에 있는 모든 타자들과 함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어떤 역사를 글자나 말로 전해 듣는 것과 구체적인 형태나 이미지로 목격하는 일은 다르다. 미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형태를 현실에 가져오는 행위다. 미술을 통해 타인의 역사를 마주하는 일은 그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빚어진 그의 역사를 경험하는 일이다. 형태와 이미지로 구체화한 타인의 역사를, 우리는 보았다고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격된 역사는 그것을 목격한 우리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역사가 형태를 가진 '여기'는,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곳이기도 하다. 미술 스스로는 누군가를 치유하거나 목숨을 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나 타인의 슬픔을 어떤 형태로 빚어내는 일은, 끊어진 우리의 역사를 다시 이어주고 그것을 목격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서로 다름에도 다르지 않고,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함께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우리의 역사를 말이다.

당연한 말임에도 뜻을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상투어로 남아 공허해지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들도 좋은 위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이 두 작가가 그들의 작업으로 비추는 재구성된 시야는 위로를 넘어 우리가 타인들의 아픔 앞에 왜 함께여야 하는지를 말한다. 이들은 역사를 전유하는 개인으로서 각자의 역사를 '여기'에 펼쳐두었다. 우리가 이 역사를 언제 어디서 다시 꺼내어보든,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만날 것이다. 우리가 함께 우는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기억하는 '여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