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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렛날, 2020-2021, 사진연작.

이렛날, 2020-2021


삶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모든 것들이 없더라도,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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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3일: 삶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나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랑하는 가족과 아침 식사를 나누고 학교 혹은 직장에 나가 일과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다시 사랑하는 가족의 환영을 받는 삶'을 떠올린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처럼 우리가 의자라는 단어를 말할 때 떠올리는 의자가 가장 이상적인 의자라고 한다면, 이러한 삶의 형태가 삶의 이데아,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의 조금도 나누고 있지 않다. 나는 혼자 어두운 밤에 일어나기도 하고, 아무 일이 없는 하루를 보내기도 하며, 불이 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한 삶도 우리가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거의 처음으로 기약 없이 일과가 없는 삶을 산다. 학교나 군대처럼 언제나 어떤 정해진 일과가 있었던 때와는 달리, 느즈막히 일어나 소위 '생산적'이라고 말하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정말 삼시세끼 밥만 먹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느즈막히 잠에 든다. 그렇다면 나는 이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삶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그 어떤 요소도 없음에도, 나는 이를 나의 삶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다시 어떤 실패를 향하게 되었다. 우리가 앞선 삶의 기준에서 실패한 삶을 살 때, 우리는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완성되지 않은 수레바퀴에 수레바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 우리가 생각하는 '생산적'인 삶에 휴식은 없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누군가를 위해야 한다. 그래서 휴식은, 지극히 자신만을 위한 휴식은 그러한 삶에 반대한다. 휴식은 삶을 멈추고, 삶을 멈추는 것은 즉 죽음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휴식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우리 삶을 정지시키는 죽음일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휴식 중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다시 일어날 언젠가를 꿈꾼다. 지금은 더 큰 한 걸음을 위한 휴식이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그것은 결코 휴식이 아니다. 우리는 휴식 중에도 사실 계속 일하고 있다.

... 그래서 나는 보다 무용한 삶을 꿈꾼다. 아직 오늘날의 전시가 이룩하지 못한, 질서에 들어맞지 않는 쓸모없는 죽음-삶을 꿈꾼다. 나는 나의 삶을 위로하는 생산물로 그런 무용함을 꿈꾼다. 이를 통해 화이트큐브의 하얀색으로 칠해지지 않는 나만의 색채를 꿈꾼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나는 죽음을 꿈꾼다. 나의 무용함이 단 하나의 쓸모가 있다면, 나를 죽이는 타자로서의 쓸모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0년 5월 19일: 내용 없는 하루를 보내면서 나는 말 못하는 짐승의 하루 같은 것들을 상상했다. ... 인간이 상상하는 자연은, 야생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언제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다른 동물에게 먹힐지 모를 긴장 상태. 그래서 야생에서 어떤 동물은 숨고, 어떤 동물은 무리를 만든다. 그래서 인간이 상상하는 자연은 언제나 무언가가 달리고, 추격하고, 뜯어 먹히는 장면. ... 이건 어떤 비판으로 기능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저 이미지적 시도. ...